법창야화 제3회 : 신성한 옥새 근대

3. 신성한 옥새



국왕의 옥새는 중요한 결정을 공증하는것이므로, 이를 보관하는 자의 책임이 큼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에어새를 보관하는 나이다이진(內大臣)에 상당하는 관직은 어느 나라에서나지고한 요직이었고, 영국에서는 장새 대신(藏璽大臣)에게 ‘Keeper of the King's Conscience’ 국왕의 양심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였으므로, 만에 하나 군주가 법률을 어기는 조서, 칙서 등을 내리려 할 때에는이를 간언할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장새 대신에 관한 다음과 같은 두 미담이 있다.

프랑스의 샤를 7세가 하루는 살인죄를 저지른 한 총신의 사형을 사면해 주고자, 장새대신인 모르비유(Morvilliers)를 불러, 그 사면장에옥새를 찍게 하려 하였다. 모르비유는 그 사면을 불법한 것이라하여 이에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왕은 노하여옥새는 짐의것이니라.” 라 하며 이를 대신의 손으로부터 빼앗아 찍은 후에 모르비유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모르비유는 이를 받지 아니하고, 분연히 다음과 같이 상주하고는그 직을 반납하였다.
폐하, 이 옥새는 신에게 두 번의영광을 주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신이 전에 폐하로부터 이것을 받은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는 신이 지금 이것을 폐하로부터 받지 아니한 때이옵니다.”

루이 14세가 폐신(嬖臣)인 한 귀족의 중죄를 특사하고자 할 때, 장새 대신인 보아상(Voisin)은 충심으로 간언하였으나 왕은 전혀 이를 듣지 아니하였고, 강제로옥새를 가져오게 하여 직접 이를 찍고 대신에게 돌려주었다. 보아상은 심히 맹렬한 안색과 어조로폐하, 이 옥새는 이미 더럽혀졌사옵니다. 신은 더럽혀진 옥새의 기탁을 받을 수 없사옵니다.” 라 말하고는, 탁자 위의 옥새를 밀치고는 단연히 사직의 결의를 보였다. 왕은완고한 사내로다.” 라 하며, 사면의칙서를 불 속에 던져넣었으니, 보아상이 이를 보고는 그 안색을 부드럽게 하고는 상주하여 가로되. “폐하, 불은 모든 더러움을 정화시켜 준다 하옵니다. 옥새도 다시 청결하게 되었사오니, 신은 다시 이를 보관하겠사옵니다.”

보아상과 같은 자는 그 주인을 요순과 같이 하는 자라 할 것이다.


법창야화 제2편 : 하나피, 관직을 거절하다 근대

1.normal "Times New Roman"; font-size-adjust: none; font-stretch: normal;' abp="1527">    2. 하나피, 관직을 거절하다

회회(回回)교도의 법률가에는 네 파가 있다. 하나피, 말리키, 샤피, 한발리라 하며, 각각 그 학조(學祖)의 이름을 학파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 학조 4대가는 모두 유명한 사람들이나, 그 중에서도 하나피(Abū anīfa)의 학식은 고금에 탁월하여, 사람들이 모두 다신수(神授)의 재라 하였다. 숙적인샤피로 하여금그의 학식은 배워서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라고탄식하게 하였고, 말리키로 하여금그가 한 번 나무 기둥을금 기둥이라 하면, 그는 능히 그 기둥이 황금임을 논증할 만한 지변(智辯)을 가지고 있다.”라 경탄하게 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일세를 풍미하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피는 소위신수의 재능’을 들어 법학 연구에 바치리라는 큰 뜻을 세우고, 결코 재물과 명성으로 그 뜻을 저버리지아니하였다. 때에 쿠파(al-Kūfah)의 태수는 그의 명성을듣고는 판관의 직을 내려주고자 하였으나, 아무리 권하여도 응하지 아니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높이 대접하여 재삼 청하여도 여전히 고사하여 받지 아니하였다.태수도 이에 대노하여 맹세하기를, 그 썩은 유생을 자신의 명에 굴종하게 하리라 하여, 하나피를 잡아다 저잣거리에 끌어내어 태형을 내리기를 매일 열 대씩 열흘간에 이르렀으나 그럼에도 결단코 움직이지아니하니, 태수도 이에 지쳐 결국은 사면하였다. 

이후 몇 년이 지난 후에, 똑 같은 운명이 다시 그를 덮쳐왔다. 만수르의 칼리프가 그를 바그다드로불러 그 학설을 경청하고는, 이에 판관의 직분으로 답례하고자 하였다.그러나 돌과도 같은 그의 의지는 결코 움직일 수 없었다. 성급한 왕은 바로 분을 내어 그를옥에 가두었기에, 이 절세의 법률가는 결국 그 귀중한 목숨을 영어(囹圄) 속에서 잃고 말았다.

로마 법족의 법신(法神) 파피니아누스는 무고한소장을 쓰지 아니하고 절개를 지키어 죽었고, 회회 법족의 법신 하나피는 영예로운 직분을 거절하고 죽음으로서그 뜻을 지켜냈다. 학자가 한번 그 뜻을 세운 뒤에는, 헌면(軒冕)으로 이를 유혹할 수 없고, 정확(鼎鑊)으로 이를 위협할 수 없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부 또한 그 뜻을 빼앗아서는 안되건대 하물며 법률가는 어떻겠는가?



헌면(軒冕) : 높은 관직
정확(鼎鑊) :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사람을 삶아 죽이던 큰 솥, 극형


법창야화 제1편 : 파피니아누스, 죄안을 기초하지 않다 근대

장대하게 시작한 무로마치 바쿠후 연재글이 자료수집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사이에, 땜빵용으로 번역글을 한편 소개해볼까 합니다. 바로 '법창야화(法窓夜話)' 라는, 메이지-다이쇼 연간의 일종의 법률 예화집입니다.

저자인 호즈미 노부시게(穂積陳重)는, 일본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이자, 민법전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사람인데요, 이런 당대의 엘리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교양을 쏟아부어 '법이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에 답하기 위해 만든 책입니다. 자연히 동서양의 고전부터 당시의 최신 이슈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서, 번역하는데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한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물론 그만큼 재미는 보장드립니다^^



1. 파피니아누스, 죄안을 기초하지 않다.

선비가 가장 중히 여겨야 것은 절의이다. 일어설 때도 이에 따르며, 움직일 때도 이에 기초하며, 나아갈 때도 이를 지향한다. 절의를 높이기를 물과 앞에서도 이를 주저하지 아니하며, 절의가 없으면 왕후의 위엄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의돈(猗頓) 부로도 유혹하지 못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선비라 칭할 있을 것이다. 학자는 실로 선비 중의 선비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논하여 일세의 지식을 이끄는 것이 학자이다. 학리의 심오함을 추구하여 천하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학자이다. 당당한 정론으로 정치가에게 시정의 방침을 보이고, 의연히 이를 의논하여 만중에게 처세의 대도를 가르침도 모두 학자의 임무가 아닌가. 스스로 학자가 되려 하는 자는, 학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던질 각오도 하지 아니하고 어찌 임무를 지킬 있을 것인가. 학자의 안중에는 학리는 있으나 이해는 없다. 구구한 지위, 편편한 재산은 학리 앞에 비하면 무엇인가. 학리가 높이는 것은 절의를 높이는 것이다.

로마의 카리칼라(Caracalla) 황제가 이유 없이 동생 게타(Geta) 죽이고, 즉시 당시의 법률가인 파피니아누스(Papinianus) 불러 명하여 이르되

짐이 지금 게타에게 죽음을 내렸노라. 그대는 이유를 찾아 죄안을 기초하도록 하라.”

 
하니, 안색과 음성이 심히 맹렬하여 번개가 내려치는 같고 바람과 구름이 몰려드는 같았다. 이를 들은 파피니아누스는 엄연히 의관을 바르게 하고 아뢰기를

이미 무고한 자를 죽이고도 만족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죄악을 더하고자 하시는도다. 이는 실로 이의 모살을 하는 것이옵니다. 패륜을 변호하는 것은 이를 범하는 보다 어려우니, 폐하께서 만일 신의 붓으로 하여금 대악으로 더럽히게 하시고자 하시오면, 차라리 신에게 죽음을 내려 주시옵소서.”

대답하고는, 태연자약하였다. 조정에 가득한 백관들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땀을 틈도 없이 황제가 대노하여 벼락을 쏟아내었다.

닥쳐라! 썩은 선비놈아, 짐이 네놈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폭군의 명령은 추상과도 같았다. 하얀 칼날을 한번 휘두르니, 절세의 선비가 목과 몸을 달리하였다.

파피니아누스는 실로 로마 법률가의 거벽이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인용법에서도,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우르피아누스, 가이우스, 모데스티누스의 오대 법률가의 학설은 법률의 효력이 있다 정하여,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다수설에 의거하여 이를 결정하였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거나 학설이 동수로 갈라진 경우에는 파피니아누스의 설에 따르도록 것을 보건대, 당시의 법조 가운데 그가 점하는 탁월한 지위를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존숭하는 이유는, 오로지 학식에서만은 아니다. 의연한 절의가 있을 처음으로 나의 존경할 만한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학문이 능한 자는 얼마든지 구할 있을 것이나 그와 함께 높은 절개까지 가진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서양에 정의의 편에 서서 두려움이 없고, 학리를 위해서라면 목이 달아나는 조차 피하지 아니하는 파피니아누스가 있고, 동양에는 연왕 성조(成祖) 앞에 붓을 내던지고죽으면 죽으리오나, 조서는 쓰지 못하겠소라고 절규한 명조의 유학자 방효유(方孝孺) 있다. 나의 뜻을 굳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는 퀴자(Jacques Cujas) 같이법률의 수호신’, ‘만세의 법률 교사라는 찬사를 법률가 앞에 바치고 싶다. 기번(Gibbon)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That it was easier to commit than to justify a parricide” was the glorious reply of Papinian, who did not hesitate between the loss of life and that of honour. Such intrepid virtue, which had escaped pure and unsullied from the intrigues of courts, the habits of business, and the arts of his profession, reflects more lustre on the memory of Papinian, than all his great employment, his numerous writings, and the superior reputation as a lawyer, which he has preserved through every age of the Roman jurisprudence.(Gibbon's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무로마치 태평기 - 0. 프롤로그 중세

무로마치 태평기

 

안녕하세요 카츠입니다.

어쩌다보니 블로그를 열자마자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사실 예전부터 전국시대, 메이지 유신 등에 가려져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아니 아예 존재감조차 없는 '무로마치 시대' 에 대해 한번쯤 정리해봐야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었는데, 주변 분들의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키보들를 쥘 용기가 생겨서 도전해복 되었습니다. 정말 부족한 글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머릿말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잡담을 좀 늘어놓고자 합니다.

 

없는 센스를 쥐어짜서 '무로마치 태평기' 라는 그럴듯한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전혀 태평한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제가 이렇게연재글을 쓸 여지도 있었겠죠. 실제로 산다고 하면 물론 전란과 동떨어진 평화롭고 태평한 시대를 고르겠지만, 구경꾼 입장에서는 싸움구경,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니까요.

 

독자 여러분께 한 가지 당부드리고싶은 것은, 다른 나라의 역사, 특히 한국사의 왕조구분법이라는관점에 기반해서 '카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와 같이 떡 썰듯 깔끔하게 끊어지는 설명은 아마 연재 내내 없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이번에 연재하는 무로마치 막부만 하더라도, 당대에는 그런 이름으로불리지 않았을 뿐더러, 성립 연도, 멸망 연도같은 기본적인사실조차 여러 설이 난립해서 굉장히 애매하거든요. 거기다 각각 그렇게 주장할 만한 개연성을 갖추고 있고요. 따라서 이번 연재에서는, 한 사실에 대해 여러 설이 난립할 경우,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이 설들을 전부 소개하고,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께서내리실 수 있도록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고, 저와독자 여러분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연재가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일러두기

고유명사의 표기는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따르지 아니하고, 원어 발음을 살려 표기합니다.

연도, 날짜 표기는 연호 등 당대의 표기법을 따르되, 서력을 병기합니다.

특정 혈연집단 전체를 가리킬 때는 '()', 혈연집단 내 특정한 혈연관계(=가족)을 가리킬 때는 '()'를 사용합니다(ex. 아시카가 씨 아시카가 쇼군 가).

 

 

 

 

0.프롤로그

 

'무로마치 시대' 에 관한 연재를 구상하면서,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많이 했습니다.
원론적으로야 초대 아시카가 타카우지부터, 16대 아시카가 요시아키까지를 다루면 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독자들이 이 생소한 시대를 잘 이해할 수있을까 싶었지요
.

그래서 본편을 시작하기 전에,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무로마치 시대라는 새 시대가열리게 되었는가' 를 한두 편 정도 분량으로 간단히 설명해볼까 합니다.이 부분은 전체적인 흐름만 짚어가면서 주마간산 격으로 휙휙 지나갈 예정이니, '이런 일이있었구나' 정도로만 가볍게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물론 지적, 비판및 정정요구와 같은 피드백은 격하게 환영합니다^^

 

 


0.1무로마치 이전의 일본

 

0.1.1조정과 쿠게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8

 

 

8세기의 율령 반포 이래, 조정은 혈통에 기반한 극소수의상류층, 즉 쿠교(公卿)들에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 쿠교는 한자 그대로 공()과 경()을 가리키는데요,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 -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사다이진(左大臣), 우다이진(右大臣) 및나이다이진(大臣), 쥰다이진(准大臣)

() - 다이나곤(大納言), 츄나곤(中納言), 산기() (각성청의 장관은 포함되지 않음에 유의)

+산기를 지내지 않은 자 중 위계가 종삼위 이상의 자

 

보시면 알겠지만, 산기()가 하나의 기준이었습니다. 이 산기란 말 그대로 국사를 논하는 조의(朝議)에 참가하는 직책을 가리키는데요, 이렇게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일본의 율령에서는 관직을 크게 산기인자와, 산기가 아닌 자(히산기非)로 나눕니다.

 

이 쿠교의 자리는 상당히 공고한 세습제였습니다. 일본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신라의 골품제를 생각하시면 얼추 비슷한 면이 있지요. 이렇게 쿠교의 지위를 세습하는 가문을 쿠게(公家)라고 하는데,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가격(家格)

극관(極官)

설명

셋케()

셋쇼(), 칸파쿠()

후지와라 본류

세이카케(華家)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산죠, 사이온지 등 7가문(후에 2가문 추가)

다이진케(大臣家)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3가문, 극관은 사실상 나이다이진

우린케(羽林家)

코노에츄죠(近衛中),

다이나곤(大納言)

66가문, 무관 및 무사

메이케(名家)

다이나곤(大納言)

28가문, 문관

한케(半家)

다이나곤(大納言)

26가문, 히산기가 주류

 

이 쿠게는 대부분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후손들로, 왕실과의인척관계에 기반하여 세력을 구축, 유지해왔습니다. 물론 후지와라씨 출신이 아닌 쿠게도 있었지만, 주류는 어디까지나 후지와라 씨였죠.

 


 

0.1.2인세이 시대

 

 

야마호시의 강소()

 

8세기부터 10세기까지200년 넘게 이어져 온 후지와라 씨의 치세는, 후지와라 씨와의 혈연관계가 먼 시라카와텐노(白河天皇)의 시대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시라카와 텐노는 후지와라 씨에게 잠식당한 왕권을 되찾기 위해, 아직강건하던 34세의 나이에 아들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정무를 보았습니다. 원래 외척 출신의 셋쇼, 칸파쿠가 담당하던텐노의 보호자 역할을 친아버지가 맡았던 거죠. 왕위를 물려준 텐노, 즉상황 개인 및 상황을 중심으로 한 통치 기구를 '()' 이라고 하고, 이러한 통치체제를'인세이(院政)' 라고 합니다.

 

이 때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천하삼불여의(天下三不如意)인데요, 말하자면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쥔 기라카와 상황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가리킨 말입니다.

1.카모가와(加茂川) 의 물난리

2.쌍륙()의 주사위 눈

3.야마호시(山法師)의 난동

 

이렇게 후지와라 씨에 대항할만한 강대한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힘을 가진 무사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무사들은 단순히 무력을 앞세운 무뢰배들이 아니라, 지방의 장원경영을 기반으로 경제력과 무력을 갖춘 실무자적 집단이었지요. 그리고 이들은 조정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막대한 자금을 헌납하는 대신, 조정으로부터 적당한 관위와 이권을 받는 공생관계를 구축했습니다.

 

 


0.1.3무사의 대두

 

1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화면 좌상단)

112311601

 

이렇게 권력에 접근하기 시작한 무사들이었지만, 본래 신분이 낮았던지라 조정 내에서의 입지는 미약했습니다. 자기장원에서는 떵떵거리고 사는 주인님이지만, 조정에 출사하면 쿠게 꼬맹이한테도 굽신거려야 할 정도로 신분의벽이 높았기 때문이죠.

 

 

 


스토쿠 텐노(崇徳天皇)
1119~1164

하지만 이런 신분제가 뒤집혀지는 순간이찾아왔습니다. 시라카와 상황의 사후, 황위계승을 둘러싸고토바 상황(鳥羽上皇),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측과 스토쿠 텐노(天皇)측이 대립각을 세웠고, 이는 각각 휘하의 무사들을 동원한 실력행사로이어졌습니다. 이것이 호겐의 난(保元)인데, 여기에서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타이라노 키요모리() 등이 텐노 즉위에 대한 공헌을 기반으로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3년 후인 헤이지 원년(1159), 호겐의난 평정 이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졌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타이라노 키요모리가진압했습니다(헤이지의 난).

 

이 두 전란에서 모두 승리한 타이라노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텐노 치세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고, 무사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다이죠다이진에 올라 헤이케(平家) 정권을수립합니다.

 

 


0.1.4겐페이 동란과 무가정권

1

겐페이 합전 병풍도(源平合戦屏)1

 이 시대를 다룬 군기물인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라는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기원정사(祇園精)의 종소리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울림이 있고, 사라쌍수(沙羅)의 꽃잎에는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이치가 담겨 있으니, 교만한 자도 영원하지 못하고 그저 봄 밤의 꿈과 같더라. 용맹한자도 결국은 멸망하니, 실로 바람 앞의 먼지와 같다."

 

영원할 것만 같던 헤이케 정권도, 키요모리의 사후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들요리토모(), 조카인 키소 요시나카(義仲) 등의 반란으로 인해 쿄토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겐랴쿠 2 3, 혼슈와 큐슈를나누는 칸몬 해협에서 벌어진 단노우라 해전(浦合)으로헤이케 일족은 멸망했고, 쿄토의 조정과 카마쿠라의 바쿠후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습니다.

 
 

0.1.5죠큐의 난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

11801239

 

이렇게 일본 열도를 동서로 나누어통치하던 쿄토 조정과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였습니다만, 서로의 경제력의 근원인 장원() 지배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쿠후는 전국의장원에 관리를 파견해서 세금을 걷었고, 이는 장원의 주인인 텐노, 상황및 쿠게들의 경제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지요. 여기다,당대의 통치자였던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이군사적인 면에서 나름대로 능력을 보인 야심가였던 점이 기름에 날아든 불씨와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1

쇼군 사네토모가 암살당한 츠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1

  

죠큐 원년(1219) 1, 카마쿠라 바쿠후의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사촌인쿠교()에게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족 내부의 암투, 암살은당시로서는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만큼은 달랐습니다. 모든 무사들의 정점에 선 쇼군이 암살당하고, 암살자인 그 사촌이처형당하면서, 무가의 동량(棟梁)의 지위를 세습해 온 미나모토 씨 종가의 혈통이 단절된 사건이기 때문이었지요.

 

쿄토에서 쇼군 암살 소식을 들은 고토바상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쿠후에 대한 간섭을 시작했습니다. 고토바상황의 장남인 츠치미카도 상황(土御門上皇)은 아버지의 강경한태도에 반발하며 중립을 선언했지만, 차남인 쥰토쿠 텐노(天皇)는 주전론을 펴면서 고토바 상황의 움직임에 동조했고, 아들인 츄쿄텐노(仲恭天皇)에게 텐노 자리를 물려준 후에 적극적인 반바쿠후 활동에 나섭니다.

 

죠큐 3(1221) 5 14, 고토바 상황은 군사훈련을 빌미로 1700여기의 병력을 소집해 거병했고, 그 다음날에는 바쿠후의 실권자이자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남인 호죠 요시토키(義時)에 대해 토벌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명령이 제대로 먹혀들면, 전국의 무사들이 관군으로서역적 호죠 요시토키를 토벌하기 위해 몰려들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로 인해 사기가 엄청나게 올라간 상태였다고합니다.

 

고토바 상황이 거병했다는 급보는, 사건 발생 5일 후인 19일에카마쿠라에 전해졌습니다. 무사들은 심각하게 동요하기 시작했지요. 보다못한 요리토모의 미망인 호죠 마사코(方子), 이날에 다음과 같은 엄포를 놓았다고 합니다.

 

"모두마음을 하나로 모아 받들도록 하라. 이것은 마지막 경고이니라. 고우다이쇼군(요리토모)께서 역적을 정벌하시고 칸토 지방을 개척하신이래, 관위며 봉록이며 그 은혜가 이미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니라. 어찌 은혜를 갚겠다는 뜻이 얕을 수 있느냐. 그런데 (상황이) 지금 간신들의 참언을 믿고 의롭지 못한 명령을 내리셨느니라. 명성을 중히 여기는 자들은 속히 히데야스, 타네요시 등을 토벌하고삼대 쇼군의 못 다한 뜻을 이루도록 하라. 단 조정에 달려가고자 하는 자는, 지금 나서도록 하라."

 

이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든 바쿠후무사들은 즉시 회의를 열어, 5 22일에 토카이도(東海道), 토산도(東山道), 호쿠리쿠도(北陸道)의각 가도를 따라 군대를 올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때, 주공인토카이도 방면을 담당한 호죠 야스토키(泰時), 고작 18기만을 이끌고 출발했다고 하니, 그 다급함을 알 수 있겠지요.

 

1

죠큐의 난 작전도1

당대의 기록물인 '마스카가미()' 에 따르면, 이날 출발한 야스토키는 갑자기 다음 날 말머리를 돌려카마쿠라로 돌아와서는, 총대장인 호죠 요시토키에게, '만약주상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요시토키는, "주상께 활을 당길 수는 없다. 그 자리에서 갑옷을 벗고, 훨시위를 풀고 항복하라. 쿄토에서 군대만 보내어 온다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라." 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호죠 마사코의 일침 때문이었는지, 정말 은혜를 느껴서인지, 바쿠후 군은 순식간에 19만 명으로 불어났고, 거병으로부터 딱 한달만인 6 14일에는 쿄토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반란의 주범인 고토바 상황은 오키노쿠니로, 쥰토쿠 텐노는사도노쿠니로 각각 유배되었고, 이에 가담한 쿠게, 무사들은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호죠 씨를 중심으로 한 바쿠후 우위의 시대가 백여년 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카츠 카이슈의 중국 인식 근대


이글루스 이사를 기념해서, 블로그명의 유래가 되기도 한 카츠 카이슈의 중국 인식에 대해 짧은 글을 써볼까 합니다.

카츠 카이슈는 다들 아시다시피, 에도 기 말부터 메이지 기 초기에 활동한 관료이자 정치가입니다.
바쿠후에서는 지금의 참모총장격인 해군총재, 육군총재를 지냈고, 메이지 신정부에서는 해군경, 추밀고문 등을 지낸 엘리트죠.

이 사람이 추밀고문관(=군주의 상담역)을 지내던 시기, 일본은 청일전쟁이라는 국운을 건 도박에 나섭니다.
여론은 청과 일전을 벌여 일본의 기개를 보여주자는 주전론으로 들끓었지만, 당시 정치가 중 거의 유일하게 전쟁에 반대한 사람이 이 카츠 카이슈였지요.



카츠의 발언을 정리한 카이슈 어록의 기사를 통해,  당시 지식층의 주류였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비교해보고, 미쳐 돌아가던 시대에도 이런 식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世間では百戦百勝などと喜んで居れど、支那では何とも感じはしないのだ。そこになると、あの国はなかなかに大きなところがある。支那人は、帝王が代らうが、敵国が来り国を取らうが、殆ど馬耳東風で、はあ帝王が代つたのか、はあ日本が来て、我国を取つたのか、などいつて平気でゐる。風の吹いた程も感ぜぬ。感ぜぬも道理だ。一つの帝室が亡んで、他の帝室が代らうが、誰が来て国を取らうが、一体の社会は、依然として旧態を損して居るのだからノー。国家の一興一亡は、象の身体(からだ)を蚊(か)か虻(あぶ)が刺すくらゐにしか感じないのだ。ともあれ、日本人もあまり戦争に勝つたなどと威張つて居ると、後で大変な目にあふヨ。剣や鉄砲の戦争には勝つても、経済上の戦争に負けると、国は仕方がなくなるヨ。そして、この経済上の戦争にかけては、日本人はとても支那人には及ばないだらうと思ふと、俺は密かに心配するヨ。」

  "세간에서는 백전 백승이라고 기뻐들 하고 있지만, 지나에서는 아무 느낌도 안 들 거야. 그런 면에서 그 나라는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어. 지나 사람들은 제왕이 바뀌든 말든, 적국이 쳐들어와서 나라를 뺐든 말든 거의 마이동풍이라, 아아 제왕이 바뀌었다더라, 아아 일본이 쳐들어와서 우리 나라를 뺐었다더라 하며 신경도 쓰지 않지. 바람이 분 것 정도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도 그럴 만 하다. 하나의 왕실이 망하고 다른 왕실이 들어서든 말든, 누가 와서 나라를 먹든 말든, 사회 전체는 의연하게 구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야. 국가의 흥망은 코끼리 몸뚱이에 모기나 등에가 문 정도로밖에 안 느끼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일본 사람도 지금처럼 전쟁에 이겼다고 으스대고 있으면 나중에 큰일 날지도 몰라. 칼이나 총포로 싸우는 전쟁에서는 이겨도, 경제상의 전쟁에서 지게 되면 나라를 운영할 수 없게 돼. 그리고 이 경제상의 전쟁에 있어서는, 일본 사람은 절대로 지나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나는 남몰래 걱정하고 있어."


  「日清戦争には、おれは大反対だつたよ。なぜかつて、兄弟喧嘩だもの犬も喰はないじゃないか。たとえ日本が勝つてもドーなる。支那はやはりスフインクスとして外国の奴らが分らぬに限る。支那の実力が分つたら最後、欧米からドシドシ押し掛けて来る。ツマリ欧米人が分からないうちに、日本は支那と組んで商業なり工業なり鉄道なりやるに限るよ。一体支那五億の民衆は日本にとつては最大の顧客サ。」

  "청일 전쟁은, 나는 엄청 반대했어. 왜냐면, 형제 싸움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하잖아? 가령 일본이 이겨봐야 뭘 어쩔건데? 지나는 역시 스핑크스같이 외국 놈들이 잘 모르는 게 최고야. 지나의 실력을 알아버이면 끝장인게, 유럽, 미국에서 앞다퉈 밀려들어올거야. 즉 서양 사람들이 잘 모를 때, 일본은 지나와 손을 잡고 상업이든 공업이든 철도든 시작하는 게 최고야. 말하자면 지나 5억 민중은, 일본에게 있어 최대의 고객이란 말이지."


카츠는 바쿠후 관료라는 출신성분 탓인지, 아니면 뼛속부터 탈권위와 실리로 가득 찬 에도 시타마치 출신인 탓인지, 전쟁보다는 무역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에 집중하는 발언을 거듭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만한 부분은,

'지나 사람들은 제왕이 바뀌든 말든, 적국이 쳐들어와서 나라를 뺐든 말든 거의 마이동풍이라, 아아 제왕이 바뀌었다더라, 아아 일본이 쳐들어와서 우리 나라를 뺐었다더라 하며 신경도 쓰지 않지.'

라는 부분인데요, 만세일계의 국체와 근대적 내셔널리즘을 버무려 놓은 당시 일본인들의 국가관으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외침과 그로 인한 왕조 교체를 겪어온 중국의 국가관을 이해하기 어려웠음에도, 이를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 중국인의 경제적 역량에 착목한 카츠의 발언은 선견지명이라고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한편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에 관하여 이런 발언을 늘어놓았습니다.



  「顧みて世の中を見れば堪え難いことも多いようだが、一国全体の大勢は改進進歩の一方で、次第々々に上進して、数年の後その形に顕れたるは、日清戦争など官民一致の勝利、愉快とも難有いとも言いようがない。命あればこそコンナことを見聞するのだ、前に死んだ同志の朋友が不幸だ、アア見せてやりたいと、毎度私は泣きました。」
 
  세상을 돌아보면 참기 어려운 일들이 많은 것 같으나, 한 나라 전체의 대세는 개혁 진보로 나아갈 뿐이며, 차례차례 앞으로 나아가 몇년 뒤 나타나는 모습은 청일 전쟁과 같은 관민 일치의 승리로, 유쾌하다고도 감사하다고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목숨이 붙어있기에 이러한 광경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죽어간 뜻을 같이하는 친우들이 불쌍하다. 아아 보여주고 싶었다고 나는 매번 울었습니다.


  「吾輩の目的は唯戦勝に在るのみ、戦争に勝利を得て、我国権を伸ばし、吾々同胞の日本国人が世界に対して肩身を広くするの愉快さえあれば、内は如何なる不平不条理あるも之を論ずる遑あらず。」

  소생의 목적은 그저 전승에 있을 뿐. 전쟁에서 승리를 얻어 우리 국권을 넓히고, 우리 동포인 일본국 사람들이 세계에 대하여 당당하게 나서는 유쾌함만 있다면, 안으로는 어떠한 불평, 부조리가 있더라도 이를 논할 틈이 없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