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 태평기 - 0. 프롤로그 중세

무로마치 태평기

 

안녕하세요 카츠입니다.

어쩌다보니 블로그를 열자마자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사실 예전부터 전국시대, 메이지 유신 등에 가려져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아니 아예 존재감조차 없는 '무로마치 시대' 에 대해 한번쯤 정리해봐야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었는데, 주변 분들의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키보들를 쥘 용기가 생겨서 도전해복 되었습니다. 정말 부족한 글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머릿말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잡담을 좀 늘어놓고자 합니다.

 

없는 센스를 쥐어짜서 '무로마치 태평기' 라는 그럴듯한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전혀 태평한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제가 이렇게연재글을 쓸 여지도 있었겠죠. 실제로 산다고 하면 물론 전란과 동떨어진 평화롭고 태평한 시대를 고르겠지만, 구경꾼 입장에서는 싸움구경,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니까요.

 

독자 여러분께 한 가지 당부드리고싶은 것은, 다른 나라의 역사, 특히 한국사의 왕조구분법이라는관점에 기반해서 '카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와 같이 떡 썰듯 깔끔하게 끊어지는 설명은 아마 연재 내내 없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이번에 연재하는 무로마치 막부만 하더라도, 당대에는 그런 이름으로불리지 않았을 뿐더러, 성립 연도, 멸망 연도같은 기본적인사실조차 여러 설이 난립해서 굉장히 애매하거든요. 거기다 각각 그렇게 주장할 만한 개연성을 갖추고 있고요. 따라서 이번 연재에서는, 한 사실에 대해 여러 설이 난립할 경우,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이 설들을 전부 소개하고,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께서내리실 수 있도록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고, 저와독자 여러분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연재가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일러두기

고유명사의 표기는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따르지 아니하고, 원어 발음을 살려 표기합니다.

연도, 날짜 표기는 연호 등 당대의 표기법을 따르되, 서력을 병기합니다.

특정 혈연집단 전체를 가리킬 때는 '()', 혈연집단 내 특정한 혈연관계(=가족)을 가리킬 때는 '()'를 사용합니다(ex. 아시카가 씨 아시카가 쇼군 가).

 

 

 

 

0.프롤로그

 

'무로마치 시대' 에 관한 연재를 구상하면서,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많이 했습니다.
원론적으로야 초대 아시카가 타카우지부터, 16대 아시카가 요시아키까지를 다루면 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독자들이 이 생소한 시대를 잘 이해할 수있을까 싶었지요
.

그래서 본편을 시작하기 전에,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무로마치 시대라는 새 시대가열리게 되었는가' 를 한두 편 정도 분량으로 간단히 설명해볼까 합니다.이 부분은 전체적인 흐름만 짚어가면서 주마간산 격으로 휙휙 지나갈 예정이니, '이런 일이있었구나' 정도로만 가볍게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물론 지적, 비판및 정정요구와 같은 피드백은 격하게 환영합니다^^

 

 


0.1무로마치 이전의 일본

 

0.1.1조정과 쿠게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8

 

 

8세기의 율령 반포 이래, 조정은 혈통에 기반한 극소수의상류층, 즉 쿠교(公卿)들에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 쿠교는 한자 그대로 공()과 경()을 가리키는데요,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 -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사다이진(左大臣), 우다이진(右大臣) 및나이다이진(大臣), 쥰다이진(准大臣)

() - 다이나곤(大納言), 츄나곤(中納言), 산기() (각성청의 장관은 포함되지 않음에 유의)

+산기를 지내지 않은 자 중 위계가 종삼위 이상의 자

 

보시면 알겠지만, 산기()가 하나의 기준이었습니다. 이 산기란 말 그대로 국사를 논하는 조의(朝議)에 참가하는 직책을 가리키는데요, 이렇게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일본의 율령에서는 관직을 크게 산기인자와, 산기가 아닌 자(히산기非)로 나눕니다.

 

이 쿠교의 자리는 상당히 공고한 세습제였습니다. 일본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신라의 골품제를 생각하시면 얼추 비슷한 면이 있지요. 이렇게 쿠교의 지위를 세습하는 가문을 쿠게(公家)라고 하는데,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가격(家格)

극관(極官)

설명

셋케()

셋쇼(), 칸파쿠()

후지와라 본류

세이카케(華家)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산죠, 사이온지 등 7가문(후에 2가문 추가)

다이진케(大臣家)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3가문, 극관은 사실상 나이다이진

우린케(羽林家)

코노에츄죠(近衛中),

다이나곤(大納言)

66가문, 무관 및 무사

메이케(名家)

다이나곤(大納言)

28가문, 문관

한케(半家)

다이나곤(大納言)

26가문, 히산기가 주류

 

이 쿠게는 대부분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후손들로, 왕실과의인척관계에 기반하여 세력을 구축, 유지해왔습니다. 물론 후지와라씨 출신이 아닌 쿠게도 있었지만, 주류는 어디까지나 후지와라 씨였죠.

 


 

0.1.2인세이 시대

 

 

야마호시의 강소()

 

8세기부터 10세기까지200년 넘게 이어져 온 후지와라 씨의 치세는, 후지와라 씨와의 혈연관계가 먼 시라카와텐노(白河天皇)의 시대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시라카와 텐노는 후지와라 씨에게 잠식당한 왕권을 되찾기 위해, 아직강건하던 34세의 나이에 아들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정무를 보았습니다. 원래 외척 출신의 셋쇼, 칸파쿠가 담당하던텐노의 보호자 역할을 친아버지가 맡았던 거죠. 왕위를 물려준 텐노, 즉상황 개인 및 상황을 중심으로 한 통치 기구를 '()' 이라고 하고, 이러한 통치체제를'인세이(院政)' 라고 합니다.

 

이 때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천하삼불여의(天下三不如意)인데요, 말하자면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쥔 기라카와 상황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가리킨 말입니다.

1.카모가와(加茂川) 의 물난리

2.쌍륙()의 주사위 눈

3.야마호시(山法師)의 난동

 

이렇게 후지와라 씨에 대항할만한 강대한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힘을 가진 무사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무사들은 단순히 무력을 앞세운 무뢰배들이 아니라, 지방의 장원경영을 기반으로 경제력과 무력을 갖춘 실무자적 집단이었지요. 그리고 이들은 조정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막대한 자금을 헌납하는 대신, 조정으로부터 적당한 관위와 이권을 받는 공생관계를 구축했습니다.

 

 


0.1.3무사의 대두

 

1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화면 좌상단)

112311601

 

이렇게 권력에 접근하기 시작한 무사들이었지만, 본래 신분이 낮았던지라 조정 내에서의 입지는 미약했습니다. 자기장원에서는 떵떵거리고 사는 주인님이지만, 조정에 출사하면 쿠게 꼬맹이한테도 굽신거려야 할 정도로 신분의벽이 높았기 때문이죠.

 

 

 


스토쿠 텐노(崇徳天皇)
1119~1164

하지만 이런 신분제가 뒤집혀지는 순간이찾아왔습니다. 시라카와 상황의 사후, 황위계승을 둘러싸고토바 상황(鳥羽上皇),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측과 스토쿠 텐노(天皇)측이 대립각을 세웠고, 이는 각각 휘하의 무사들을 동원한 실력행사로이어졌습니다. 이것이 호겐의 난(保元)인데, 여기에서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타이라노 키요모리() 등이 텐노 즉위에 대한 공헌을 기반으로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3년 후인 헤이지 원년(1159), 호겐의난 평정 이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졌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타이라노 키요모리가진압했습니다(헤이지의 난).

 

이 두 전란에서 모두 승리한 타이라노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텐노 치세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고, 무사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다이죠다이진에 올라 헤이케(平家) 정권을수립합니다.

 

 


0.1.4겐페이 동란과 무가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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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페이 합전 병풍도(源平合戦屏)1

 이 시대를 다룬 군기물인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라는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기원정사(祇園精)의 종소리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울림이 있고, 사라쌍수(沙羅)의 꽃잎에는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이치가 담겨 있으니, 교만한 자도 영원하지 못하고 그저 봄 밤의 꿈과 같더라. 용맹한자도 결국은 멸망하니, 실로 바람 앞의 먼지와 같다."

 

영원할 것만 같던 헤이케 정권도, 키요모리의 사후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들요리토모(), 조카인 키소 요시나카(義仲) 등의 반란으로 인해 쿄토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겐랴쿠 2 3, 혼슈와 큐슈를나누는 칸몬 해협에서 벌어진 단노우라 해전(浦合)으로헤이케 일족은 멸망했고, 쿄토의 조정과 카마쿠라의 바쿠후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습니다.

 
 

0.1.5죠큐의 난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

11801239

 

이렇게 일본 열도를 동서로 나누어통치하던 쿄토 조정과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였습니다만, 서로의 경제력의 근원인 장원() 지배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쿠후는 전국의장원에 관리를 파견해서 세금을 걷었고, 이는 장원의 주인인 텐노, 상황및 쿠게들의 경제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지요. 여기다,당대의 통치자였던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이군사적인 면에서 나름대로 능력을 보인 야심가였던 점이 기름에 날아든 불씨와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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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사네토모가 암살당한 츠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1

  

죠큐 원년(1219) 1, 카마쿠라 바쿠후의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사촌인쿠교()에게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족 내부의 암투, 암살은당시로서는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만큼은 달랐습니다. 모든 무사들의 정점에 선 쇼군이 암살당하고, 암살자인 그 사촌이처형당하면서, 무가의 동량(棟梁)의 지위를 세습해 온 미나모토 씨 종가의 혈통이 단절된 사건이기 때문이었지요.

 

쿄토에서 쇼군 암살 소식을 들은 고토바상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쿠후에 대한 간섭을 시작했습니다. 고토바상황의 장남인 츠치미카도 상황(土御門上皇)은 아버지의 강경한태도에 반발하며 중립을 선언했지만, 차남인 쥰토쿠 텐노(天皇)는 주전론을 펴면서 고토바 상황의 움직임에 동조했고, 아들인 츄쿄텐노(仲恭天皇)에게 텐노 자리를 물려준 후에 적극적인 반바쿠후 활동에 나섭니다.

 

죠큐 3(1221) 5 14, 고토바 상황은 군사훈련을 빌미로 1700여기의 병력을 소집해 거병했고, 그 다음날에는 바쿠후의 실권자이자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남인 호죠 요시토키(義時)에 대해 토벌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명령이 제대로 먹혀들면, 전국의 무사들이 관군으로서역적 호죠 요시토키를 토벌하기 위해 몰려들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로 인해 사기가 엄청나게 올라간 상태였다고합니다.

 

고토바 상황이 거병했다는 급보는, 사건 발생 5일 후인 19일에카마쿠라에 전해졌습니다. 무사들은 심각하게 동요하기 시작했지요. 보다못한 요리토모의 미망인 호죠 마사코(方子), 이날에 다음과 같은 엄포를 놓았다고 합니다.

 

"모두마음을 하나로 모아 받들도록 하라. 이것은 마지막 경고이니라. 고우다이쇼군(요리토모)께서 역적을 정벌하시고 칸토 지방을 개척하신이래, 관위며 봉록이며 그 은혜가 이미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니라. 어찌 은혜를 갚겠다는 뜻이 얕을 수 있느냐. 그런데 (상황이) 지금 간신들의 참언을 믿고 의롭지 못한 명령을 내리셨느니라. 명성을 중히 여기는 자들은 속히 히데야스, 타네요시 등을 토벌하고삼대 쇼군의 못 다한 뜻을 이루도록 하라. 단 조정에 달려가고자 하는 자는, 지금 나서도록 하라."

 

이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든 바쿠후무사들은 즉시 회의를 열어, 5 22일에 토카이도(東海道), 토산도(東山道), 호쿠리쿠도(北陸道)의각 가도를 따라 군대를 올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때, 주공인토카이도 방면을 담당한 호죠 야스토키(泰時), 고작 18기만을 이끌고 출발했다고 하니, 그 다급함을 알 수 있겠지요.

 

1

죠큐의 난 작전도1

당대의 기록물인 '마스카가미()' 에 따르면, 이날 출발한 야스토키는 갑자기 다음 날 말머리를 돌려카마쿠라로 돌아와서는, 총대장인 호죠 요시토키에게, '만약주상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요시토키는, "주상께 활을 당길 수는 없다. 그 자리에서 갑옷을 벗고, 훨시위를 풀고 항복하라. 쿄토에서 군대만 보내어 온다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라." 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호죠 마사코의 일침 때문이었는지, 정말 은혜를 느껴서인지, 바쿠후 군은 순식간에 19만 명으로 불어났고, 거병으로부터 딱 한달만인 6 14일에는 쿄토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반란의 주범인 고토바 상황은 오키노쿠니로, 쥰토쿠 텐노는사도노쿠니로 각각 유배되었고, 이에 가담한 쿠게, 무사들은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호죠 씨를 중심으로 한 바쿠후 우위의 시대가 백여년 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덧글

  • 라라 2014/11/30 22:34 # 답글

    j티비에서 키요모리에 대한 드라마 잠깐 봤는데 송나라와 직교역으로 부축적에

    수도 옮기려다 당하는 걸로 나오던데

    대단한 인물이긴 한 것 같더군요
  • 카츠 2014/11/30 23:01 #

    타이라 씨가 대송무역으로 돈을 벌어온 집안이라, 후쿠하라 천도를 통해 그런 이권을 독점하려는 시도를 했죠ㅎㅎ키요모리 생전에는 비교적 잘 굴러갔고요.
    근데 키요모리가 죽고 나니 아들들이 죄다 똥덩어리들이라 본업인 군사력에서 겐지한테 관광타고 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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